남 때문에 웃으며 삽시다. 나 때문에 웃게 합시다.

박기한 목사

저희 집에 조카 손녀가 이제 곧 돌이 됩니다. 조카네와 같이 살고 있는 저희에게 새로운 가족이 생기고 난 이후에 하하하하 크게 웃을 일이 더 많아 졌습니다. 어색한 자리에서 민망함을 피하기 위하여 웃는 그런 웃음이 아니라, 정말 가슴 속 깊이 기분이 좋아지는 웃음을 웃습니다. 조카 손녀 때문에 집에 기쁨이 더 많아 졌습니다.

조카 손녀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에도 웃을 일이 있었습니다. 성취감을 느끼거나, 간절한 기도에 응답을 받거나, 하다못해 웃긴 예능을 보다가도 웃기도 합니다. 그러나 조카손녀로 인해 웃는 웃음은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그 아이 때문에 웃는 것이고, 그 아이로 인해서 웃습니다.

나 때문에 웃는 사람은 웃을 일을 내가 만들거나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남 때문에 웃는 사람은 웃을 일을 남이 만들어 줍니다. 조카 손녀도 엄밀하게 말하면 내가 아니라 남입니다. 나 때문에 웃는 사람도 행복한 사람이지만 나를 웃게 해주는 남이 많은 사람이 더 행복한 사람입니다. 나는 하나이지만 남은 사람만 생각해도 세상 인구수에서 나 하나 뺀만큼 커질 수 있습니다. 제 조카손녀는 엄마, 아빠 때문에 그리고 같이 사는 이모할머니, 종조부 때문에 웃을 일이 많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관계로 인하여 웃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얼마나 자주 웃고 사시나요?
성경은 우리에게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다르게 해석해 보면 그리스도인에게는 나를 즐겁게 하는 남이 있어야 된다고, 나를 울게 하는 남이 있어야 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이 세대의 사람을 비유하시길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아니한다 말씀하셨습니다. (마11:17) 우리 모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나요?

남 때문에 웃고, 남 때문에 우는 그리스도인이신가요?
다양한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 남 때문에 웃고 우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목장 혹은 성경통독 소그룹에 속하거나, 사역 및 봉사를 통하여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 맺으며 사는 것이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우는 비결입니다. 그리고 아마 목원분들 보다는 목자님이 더 많이 웃고 우실 겁니다. Shelter in Place 때문에 마음이 힘든 이유는 우리가 자주 못 만나서 웃을 일이 줄어들었기 때문일겁니다.

가장 많이 남 때문에 웃으시고, 또 우시는 분은 아마 하나님이실 겁니다. 죄인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악 때문에 우셨고, 그분의 십자가 고난으로 인하여 구원받은 자들로 인해 웃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를 자녀 삼으셨기 때문에 자녀를 보는 아버지처럼, 또 손주를 보는 할아버지처럼 우리가 웃을 때 그분도 웃으시고, 우리가 울 때 그분도 우십니다. 그런 하나님처럼 우리도 남 때문에 웃으며 삽시다. 때때로 같이 울어도 줍시다.

로마서 12장 17절에서는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말씀하십니다. 남 때문에 웃고 우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늘 내가 하는 일이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인지 돌아보아 우리 때문에 세상이 웃는 그리스도인으로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