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반대는 무관심입니다

이산돌 목사

우리는 대부분 사랑의 반대 의미를 미움과 시기와 질투로 봅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끼리 부딪히고 만나고 관계를 하다보면 갈등이 생기기도 하지만 이러한 관계가 없다면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 줄 수도 없고, 서로를 사랑 할 수 있는 기회도 가질 수 없습니다.

요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어찌 보면 사랑의 반대가 되는 환경이 쉽게 이루어지는 사회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일본 방송사인 NHK에서는 몇 년 전에 ‘무연사회’라는 새로운 신조어를 만들면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으며 책으로도 출판되었습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없는 사회, 인연이 없는 사회를 일컬어 하는 말인데 일본에는 연간 3만 명 넘는 사람들이 소리 소문 없이 죽었다고 합니다. 사람과의 연결 고리를 잃어 혼자서 고독하게 살다가 죽었다는 것이지요.

이는 단지 일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은 진정한 관계를 만들 수 없고 혼자라는 외로움에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이 문제가 너무나 중요해져서 2018년에는 마침내 총리가 외로움부 장관을 임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영국인 여덟 명 중 한 명은 의지할 수 있는 가까운 친구가 단 한 명도 없다고 답했습니다. 영국 시민 4분의 3이 이웃의 이름을 몰랐고 직장인의 60%가 직장에서 외로움을 느낀다고 응답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초대형 제약 회사들은 외로움 약 개발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외로움에 둔감해지게 하는 약물과 외로움으로 인한 생리적 영향을 일부 중화시키는 다양한 화학적 혼합물이 현재 시험 단계에 있습니다.

젊은이든 노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비혼이든 기혼이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똑같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외롭고, 단절되었고, 소외되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세계적으로 외로움이라는 위기의 한 가운데에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이 위기에 노출 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는 것 같습니다. 많은 발전을 이룬 소셜 네트워크도 주변에 우리가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과의 관계를 소홀하게 만들면서 ‘늘 같이 있지만 늘 혼자’인 상태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정 안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를 들면서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요즘시대로 말한다면 ‘자신의 스케줄이 너무 바쁘거나 스마트 폰으로 이루어지는 소셜 네트워크 관계에 신경을 쓰느라 가까운 이웃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 없는 자들은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라고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성도 여러분 히브리서 10장 24절은 말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이번 여름 기간에 목장 안이나 사역 팀 안에서 서로에게 관심을 갖기 바랍니다. 이번 여름 기간에 후원하고 있는 선교지와 선교사님들에게 관심을 갖기 바랍니다. 단지 중보기도와 후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통화를 하거나 메일을 보내면서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기 원합니다. 이번 여름 기간에 여러분 주변에 홀로 있거나 외로워하는 자들에게 관심을 갖기 바랍니다. 무연사회 속에서 주님의 사랑이 필연으로 이루어지는 축복의 통로가 되길 소망합니다.